중구(서울 선거구)
덤프버전 :
관련 문서: 중구(서울특별시)/정치
중구 지역을 선거구로 하는 19대 국회의 서울지방의 선거구중 하나이다. 서울특별시청과 숭례문, 명동 등이 위치한 만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지역구였다.
통합 되기 전까지, 이 지역구의 마지막 소속의원은 국민의당 정호준 의원이었다. 정호준 의원의 아버지인 정대철 의원과 조부인 정일형 의원이 모두 이곳에서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는 서울특별시 제1선거구 중구로 선거가 진행되었으나,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들어 갑구와 을구로 분리되었다. 6대 국회에서 다시 통합되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구 획정에서는 인구 미달로 인해 성동구와 통합되어, 중구·성동구 을로 조정되었다. [1]
제헌 총선때부터 두개의 선거구로 나누어진 중구 선거구가 하나로 합쳐진뒤 치러진 선거이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때부터 중구 을 선거구에서 4선의원을 지낸 정일형 후보가 당선되었다.
민중당 정일형 의원이 한일기본조약 채결에 반발해 의원직을 사퇴함에 따라 치러진 선거이다.
종로구·중구 문서 참조.
중구의 터줏대감이던 정대철 전 의원이 일선에 물러나면서 아들인 열린우리당 정호준 후보가 지역을 관리해왔다. 하지만 정대철 전 의원이 물러난 것이 양상불법대선자금 등 비리 혐의로 구속된 것이기 때문에 여론이 좋지는 않은 상황.
한나라당 후보는 박성범 전 의원으로, KBS 9시 뉴스 앵커와 보도본부 본부장을 지냈다. 15대 총선에서는 정대철 전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었으나, 16대 총선 재대결에서는 패했다.
여기에 11년간 내리 세 번 중구청장을 지낸 새천년민주당 김동일 후보가 출마를 선언했다. 3번이나 중구청장을 한만큼 이름이 알려져 있어 애초 대결은 박성범 후보와 김동일 후보의 2파전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탄핵 역풍 등으로 정호준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 3파전 양상이 되었다.
중구는 대기업 본사가 많아 재정자립도는 높은 편이지만 주거환경이나 교육환경은 열세인 지역으로, 박성범 후보는 "특목고 및 강북 공항터미널 유치" 등을 공약했고, 15대 의원일때 명동·동대문 관광특구 유치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김동일 후보는 "11년간 중구청장으로 일한 클린 정치인"임을 강조했으며, 정호준 후보는 삼성전자 출신임을 알리며 정보통신 분야의 전문성을 부각시키고 탄핵 심판론을 앞세웠다. 이 지역에 출마한 민주노동당 최재풍 후보 역시 재래시장과 평화시장 피복노조에 지지를 호소했다.
한나라당이 서울 송파구 병 출마를 준비하던 나경원 전 대변인을 전략공천하면서 관심 지역구로 떠올랐고, 한나라당을 탈당했던 박성범 의원의 부인인 신은경 전 KBS 9시 뉴스 앵커가 중구 출마를 선언하였다. 신은경 후보는 자유선진당 대변인으로 선임되며 선거 체제로 돌입했지만 여론조사는 나경원이 크게 앞선 상황. 이때 통합민주당에서 정범구 전 의원을 이 지역구에 전략공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정범구 전 의원 역시 CBS, KBS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경력이 있어 세 후보 모두 대중에게 어느정도 이름이 알려진 상황. 정범구 후보는 17대 총선에서는 불출마 선언을 하고 이후 창조한국당에서 문국현 후보를 돕다가 이견을 보여 탈당, 4년 만에 친정인 통합민주당으로 돌아온 것이다. 중구에서는 정대철 전 의원이 터줏대감이었던 만큼 역대 선거결과가 좋았던 만큼 나경원 후보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언론에서는 나경원 후보와 신은경 후보의 대결을 '미모 대결' 같은 표현을 쓰며 가쉽거리로 만들기도 했다. 정범구 후보는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사업를 비판하며 정권 심판을 강조하였고, 나경원 후보에 대운하 사업 맞장토론을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나경원 의원은 이후 한나라당 최고위원까지 올랐으나 2011년 재보궐선거를 이유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심지어 서울시장 선거 당시에 각종 부정적 이미지가 생기면서 불출마로 이어진다.
새누리당 정진석 전 의원과 민주통합당 정호준 후보의 대결. 정진석 후보는 자유민주연합에서 한나라당에 입당해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정호준 후보는 노무현정부 행정실 비서관 및 18대 대선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 부본부장으로 일했다. 자유선진당 조순형 의원이 이 지역에 출마를 고려했다가 정호준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철회하였다.
이 지역은 정치인 2세들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다. 정진석 후보는 내무부장관을 지냈던 6선 고 정석모 전 의원의 아들이며, 정호준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으로 불렸던 8선 정일형 전 의원의 손자이자, 5선 정대철 전 의원의 아들. 중도 하차한 조순형 역시 조병옥 전 의원의 아들이다.
정진석 후보는 3선 국회의원에 국정경험(청와대 정무수석)을 갖춘 사람으로 어르신 복지와 상권 활성화를 위해 중앙예산을 끌어올 수 있는 후보임을 강조했으며, 특성화중학교를 유치하고 성동고를 자율형 기숙학교로 전환해 중구 교육에 힘쓰겠다고 공약했다.
정호준 후보는 40년 중구 토박이임을 강조하며, 서초구로 이전 예정인 국립중앙의료원을 존치시켜 서민·중산층의 의료공백을 막고 남산고도제한을 완화하겠다고 공약했다.
결과는 정호준 후보가 정진석 후보를 3.95% 차이로 제치고 당선,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던 정호준 후보는 두번째 도전에 당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3대가 무려 14선 국회의원을 한 정치 명문 집안이 탄생했다.
1. 소개[편집]
중구 지역을 선거구로 하는 19대 국회의 서울지방의 선거구중 하나이다. 서울특별시청과 숭례문, 명동 등이 위치한 만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지역구였다.
통합 되기 전까지, 이 지역구의 마지막 소속의원은 국민의당 정호준 의원이었다. 정호준 의원의 아버지인 정대철 의원과 조부인 정일형 의원이 모두 이곳에서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2. 선거구 변동 역사[편집]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는 서울특별시 제1선거구 중구로 선거가 진행되었으나,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들어 갑구와 을구로 분리되었다. 6대 국회에서 다시 통합되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구 획정에서는 인구 미달로 인해 성동구와 통합되어, 중구·성동구 을로 조정되었다. [1]
3. 역대 국회의원 목록과 역대 선거 결과[편집]
4. 중구 (6대~8대)[편집]
4.1. 제6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제헌 총선때부터 두개의 선거구로 나누어진 중구 선거구가 하나로 합쳐진뒤 치러진 선거이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때부터 중구 을 선거구에서 4선의원을 지낸 정일형 후보가 당선되었다.
4.2. 1965년 재보궐선거[편집]
민중당 정일형 의원이 한일기본조약 채결에 반발해 의원직을 사퇴함에 따라 치러진 선거이다.
4.3. 제7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해당 선거까지 후보자 이름 순서대로 기호순서가 배정되었다.
4.4. 제8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국회 의석 순서대로 후보자 기호가 배정된 첫 선거이다.
5. 종로구·중구 (9~12대)[편집]
종로구·중구 문서 참조.
6. 중구 (13~19대)[편집]
6.1. 제13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6.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6.3. 제15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6.4. 제16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6.5. 제17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중구의 터줏대감이던 정대철 전 의원이 일선에 물러나면서 아들인 열린우리당 정호준 후보가 지역을 관리해왔다. 하지만 정대철 전 의원이 물러난 것이 양상불법대선자금 등 비리 혐의로 구속된 것이기 때문에 여론이 좋지는 않은 상황.
한나라당 후보는 박성범 전 의원으로, KBS 9시 뉴스 앵커와 보도본부 본부장을 지냈다. 15대 총선에서는 정대철 전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었으나, 16대 총선 재대결에서는 패했다.
여기에 11년간 내리 세 번 중구청장을 지낸 새천년민주당 김동일 후보가 출마를 선언했다. 3번이나 중구청장을 한만큼 이름이 알려져 있어 애초 대결은 박성범 후보와 김동일 후보의 2파전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탄핵 역풍 등으로 정호준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 3파전 양상이 되었다.
중구는 대기업 본사가 많아 재정자립도는 높은 편이지만 주거환경이나 교육환경은 열세인 지역으로, 박성범 후보는 "특목고 및 강북 공항터미널 유치" 등을 공약했고, 15대 의원일때 명동·동대문 관광특구 유치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김동일 후보는 "11년간 중구청장으로 일한 클린 정치인"임을 강조했으며, 정호준 후보는 삼성전자 출신임을 알리며 정보통신 분야의 전문성을 부각시키고 탄핵 심판론을 앞세웠다. 이 지역에 출마한 민주노동당 최재풍 후보 역시 재래시장과 평화시장 피복노조에 지지를 호소했다.
결과는 박성범 후보가 45.93%를 득표, 2위 정호준 후보를 15.95% 차이로 크게 누르고 당선되었다.
6.6. 제18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한나라당이 서울 송파구 병 출마를 준비하던 나경원 전 대변인을 전략공천하면서 관심 지역구로 떠올랐고, 한나라당을 탈당했던 박성범 의원의 부인인 신은경 전 KBS 9시 뉴스 앵커가 중구 출마를 선언하였다. 신은경 후보는 자유선진당 대변인으로 선임되며 선거 체제로 돌입했지만 여론조사는 나경원이 크게 앞선 상황. 이때 통합민주당에서 정범구 전 의원을 이 지역구에 전략공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정범구 전 의원 역시 CBS, KBS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경력이 있어 세 후보 모두 대중에게 어느정도 이름이 알려진 상황. 정범구 후보는 17대 총선에서는 불출마 선언을 하고 이후 창조한국당에서 문국현 후보를 돕다가 이견을 보여 탈당, 4년 만에 친정인 통합민주당으로 돌아온 것이다. 중구에서는 정대철 전 의원이 터줏대감이었던 만큼 역대 선거결과가 좋았던 만큼 나경원 후보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언론에서는 나경원 후보와 신은경 후보의 대결을 '미모 대결' 같은 표현을 쓰며 가쉽거리로 만들기도 했다. 정범구 후보는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사업를 비판하며 정권 심판을 강조하였고, 나경원 후보에 대운하 사업 맞장토론을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접전지역일 것이라는 언론의 예측과는 달리 결과는 나경원 후보의 싱거운 승리. 2위인 정범구 후보를 18.47%, 3위인 신은경 후보를 23.45% 차이로 크게 누르고 당선되었다.
6.7. 제19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나경원 의원은 이후 한나라당 최고위원까지 올랐으나 2011년 재보궐선거를 이유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심지어 서울시장 선거 당시에 각종 부정적 이미지가 생기면서 불출마로 이어진다.
새누리당 정진석 전 의원과 민주통합당 정호준 후보의 대결. 정진석 후보는 자유민주연합에서 한나라당에 입당해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정호준 후보는 노무현정부 행정실 비서관 및 18대 대선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 부본부장으로 일했다. 자유선진당 조순형 의원이 이 지역에 출마를 고려했다가 정호준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철회하였다.
이 지역은 정치인 2세들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다. 정진석 후보는 내무부장관을 지냈던 6선 고 정석모 전 의원의 아들이며, 정호준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으로 불렸던 8선 정일형 전 의원의 손자이자, 5선 정대철 전 의원의 아들. 중도 하차한 조순형 역시 조병옥 전 의원의 아들이다.
정진석 후보는 3선 국회의원에 국정경험(청와대 정무수석)을 갖춘 사람으로 어르신 복지와 상권 활성화를 위해 중앙예산을 끌어올 수 있는 후보임을 강조했으며, 특성화중학교를 유치하고 성동고를 자율형 기숙학교로 전환해 중구 교육에 힘쓰겠다고 공약했다.
정호준 후보는 40년 중구 토박이임을 강조하며, 서초구로 이전 예정인 국립중앙의료원을 존치시켜 서민·중산층의 의료공백을 막고 남산고도제한을 완화하겠다고 공약했다.
결과는 정호준 후보가 정진석 후보를 3.95% 차이로 제치고 당선,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던 정호준 후보는 두번째 도전에 당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3대가 무려 14선 국회의원을 한 정치 명문 집안이 탄생했다.
[1] 갑 선거구는 순수 성동구로만 구성되어있고, 중구와 성동구 일부가 합쳐진 선거구가 을 선거구이다.[2] 1965.8.7 의원직 사퇴 (한일 기본조약 체결 반대)[3] 1977.4.11 임기 도중 사망[4] 1977.3.22 의원직 사퇴[5] 1987.11.6 의원직 사직[6] 2011.9.28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로 인한 사퇴[7] 명동, 필동, 소공동, 회현동, 장충동, 광희동, 동화동, 황학동, 중림동, 소공동, 신당동, 다산동, 약수동, 청구동, 신당5동, 을지로동[중구] A B C D E 명동, 필동, 소공동, 회현동, 장충동, 광희동, 동화동, 황학동, 중림동, 소공동, 신당동, 다산동, 약수동, 청구동, 신당5동, 을지로동[8] 최종 미등록 예비후보[9] 불과 17표 차이였다.[10] 불과 22표 차이였다.